새로 얻은 아들딸이 서른넷이나 됩니다!


- 치과대학 박병석 장학금 기부한 박영수 기부자 -


아들이 세상을 떠난 1988년 가을부터 아들이 다니던 치과대학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온 아버지 박영수 씨를 만났다.




   아들의 후배를 아들로 키우다


   아들은 총명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몸이 약해 학업이 순조롭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들은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에 진학했다. 2학년 여름방학,

   온 가족이 함께 떠난 휴갓길에 사고가 터졌다. 아들은 갑자기 떠났다.

   아버지의 기둥은 부러졌다. 어마어마한 상실감이 찾아왔다.

   추스르고 일어나려면 무어라도 해야 했다.

   아버지 박영수 씨(전 광주은행장)가 택한 방법은 엉뚱하게도

   ‘아들의 후배들을 키우는 길’이었다.


  “자식을 잃어보지 않은 이들은 그 심정을 모릅니다. 제 목숨보다

   귀한 아이를 잃은 상처를 치유할 방도를 찾던 차에 장학금을 떠올린 

   겁니다. 자식이 다니던 학교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아주 소박한 생각이었죠.”


   아들의 이름을 넣은 ‘박병석 장학금’은 그렇게 태어났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1988년 가을부터 두 학생을 선발해 각각 50만원씩 

   장학금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별 어려움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산업은행에 입사해 부총재보 자리에 오르기까지 꾸준히 

   모아놓은 돈을 기금으로 출연하고 이자로 장학금을 줄 작정이었다.


  “증권 붐이 일었어요. 증권에 투자하면 훨씬 더 큰 소득을 올리고 

   장학금 규모도 키울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맡겼다가 낭패를 보고 

   말았죠. 그때부터는 월급을 쪼개서 장학금을 주어야 했어요.

   일흔이 넘도록 월급쟁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게 천만 

   다행이었어요. 한국기술금융 사장과 회장 임기를 마치고도

   뜻하지 않게 광주은행장까지 지냈거든요.”






감사로 남은 지난 30년 장학금


그렇게 이어온 장학금의 나이가 2017년으로 서른 살이다.

지원액도 50만 원에서 200만 원으로 꾸준히 늘어 그동안 후원한 

총액이 1억 5천만 원에 육박한다. 도움을 받은 학생들은 34명을 

헤아린다. 돈만이 아니라 마음도 꾸준히 건너갔다. 학생과장과 함께 

지방 보건소에 나가 있는 학생들을 찾아가 밥을 사먹이며 격려했다. 

수혜자들을 집으로 불러 밥을 지어 먹였다. 학생들은 박영수 씨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위로’와 ‘보람’을 돌려주었다.



“수혜자가 늘어나면서 선후배 사이가 상당히 끈끈해졌어요.

식구 같아진 거죠. 졸업 인사를 하러 광주까지 찾아온 친구들도 있고, 

주례를 서달라고 부탁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어요.

혜택을 받은 선배가 졸업한 뒤에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물려주는 전통도 생겼고요.

아들은 떠났지만 그 후배들을 통해 정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첫 장학금을 낸 지 30년을 맞으면서 이제는 한 발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학교에 마지막으로 3억 원의 기금을 출연하고 운영을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박영수 씨의 소회에는 ‘감사’만 가득하다.


“장학생들을 지켜보며 얻은 것이 참 많습니다.

연세의료원으로부터도 한 일 없이 지나치리만큼 큰 사랑을 받았고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